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문단 편집) === 정당별 결과 분석 === ||<-5> '''무소속 당선인들의 복당이 가능한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 무소속의 경우 민주계 3석, 보수계 2석.] || ||<-2> [[연립 정부|여권]] 135석[* 당시 자유민주연합은 새천년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꾸렸다.] ||<-3> [[야당|야권]] 138석 || || [[새천년민주당|{{{#white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white 자유민주연합}}}]] || [[한나라당|{{{#ffffff '''한나라당'''}}}]] || [[민주국민당(2000년)|{{{#ffffff 민주국민당}}}]] || [[희망의한국신당|{{{#ffffff 희망의한국신당}}}]] || || 118석 || 17석 || 135석 || 2석 || 1석 || * '''새천년민주당'''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피닉제--[[이인제]] 선대위원장 체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제주, 호남에서 충청, 수도권을 거쳐 강원까지 이른바 "S자 노선" 전국 정당을 꿈꾸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전략이 어느 정도 들어맞으며 의석수가 늘어나 호남 석권과 함께 수도권과 강원, 제주에서 1당을 차지했고[* 참고로 이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획득한 강원도 의석 수(5석/9석)는 현재까지도 민주당계 정당의 총선 최고 기록이다. 이후엔 한나라-무-새누리-통합-국힘이 계속 강원도 1당을 차지하고 있다.] 충청권에서도 상당수의 의석을 확보한다. 하지만 영남권을 공략하는 데 실패하고[* 현재 부울경이 대경권보다 민주당세가 다소 강했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대경권이나 부울경 모두 험지 중 험지였다. 그나마 이중에서 선방을 한 후보가 TK권에서 고작 '''19표(!)''' 차이로 진 [[김중권]]과 [[북구·강서구 을]]에 출마해서 35.7%를 받고 낙선한 [[노무현]] 정도가 있다, 참고로 후자는 2년 뒤 [[제16대 대통령 선거|대통령이 되고]], [[노사모|대한민국의 정치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과의 선거 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20여개 선거구를 어부지리격으로 내주며 과반 확보에는 실패하고 만다.[* 단순 산술적 계산만 따져보면 선거 공조 무산으로 서울 6석, 인천 3석, 경기 11석, 충북 3석, 경북 2석, 강원 1석해서 무려 '''26석'''을 날렸다. 물론 선거 공조를 한다고 무조건 시너지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선거 공조에 성공했으면 공동 여당이 아무리 못해도 과반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실제로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득표율을 합하면 45.7%로 한나라당을 6.7% 정도 따돌리는 수준인데 이 정도면 상당한 의석 격차를 벌려나갈 수 있는 수치다.] 수도권도 제1당 달성에는 성공했지만 경기와 인천에선 경합 우세 정도 수준이라 당초 기대치보단 못한 결과였다.[* 경기도 41석 출구조사 중 빗나간 의석이 8석이나 되었다.] * '''자유민주연합''' 공동 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은 텃밭인 [[충청도]]에서 기대보다 부실한 성적을 낸다. TK와 강원도에서 크게 선전하고 충청을 석권하며 무려 50석을 기록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15대 총선]] 의석의 1/3 토막난 결과였다. 세부 내용을 보면 반[[민주자유당]] 반[[민주당(1991년)|민주당]] 정서를 자극하여 15대 총선 당시 TK 의석을 상당히 차지했지만 16대 들어선 [[DJP연합]] 등의 여파[* 15대 총선 당시 TK 지역에서 상당수의 의석을 자민련에게 내준 한나라당(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은 15대 대선을 앞두고 TK지역의 보수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박정희]]의 둘째 딸인 [[박근혜]]를 영입했다. 비록 [[제15대 대통령 선거|15대 대선]]에서는 패했으나, TK 지역의 보수층은 한나라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리고 이후 [[1998년 재보궐선거|선]][[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거]]부터 TK 지역은 완전히 한나라당 지지로 굳어졌다. 반면, 자유민주연합은 [[제15대 국회의원 선거|15대 총선]] 당시 TK 지역에서 보수층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DJP연합 체결 직후부터 TK 지역 보수층들은 자민련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게다가, TK 지역 일부 [[안택수|국]][[이의익|회]][[박종근(1937)|의원]]들이 아예 자유민주연합에서 탈당하여 [[한나라당]]으로 넘어갔고, 이 사건은 TK지역 보수층에서 DJP연합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는걸 보여준 증표였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110800329105007&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1-08&officeId=00032&pageNo=5&printNo=16268&publishType=00010|#]] 그리고, 이후 [[1998년 재보궐선거|선]][[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거]]부터 TK지역에서는 자민련이라는 간판의 메리트가 사라지게 되었다.]로 TK를 비롯한 비충청권 보수 유권자들은 자민련 대신 [[한나라당]]에 다시 몰표를 던지게 되었고, 충청권도 당시 충청 출신인 이인제 선대위원장을 내세운 새천년민주당에 상당수 의석을 뺏기게 된다.[* 1999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이전부터 주장해온 내각제 개헌에 대해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자유민주연합의 충청권 정세가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총선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충청북도]]는 한나라당3, 민주당2, 자유민주연합2의 구도로 바뀌면서 이후 본격적인 캐스팅보터 지역으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애초에 충북 지역은 이주민이 많아 과거부터 충남보다 충청계 지역정당세가 약한 지역이었다.[* 당장 멀리갈 것 없이, [[13대 대선]] 때 김종필은 충청북도에서 2위도 아닌 3위로 고배를 마셨고, 당시 1-2위를 차지한 후보는 보수 정당의 [[노태우]]-[[김영삼]]이었다.] *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영남]] 지역을 제외하곤 (충북을 충청도로 합칠시) 어느 지역에서도 제1당이 되지 못했지만, 여권 분열 등에 힘입은 수도권 접전 지역 선방과 인구수가 풍부한 영남 텃밭의 몰아주기로 의석을 쓸어담으며[* 당시만 해도 TK권과 PK권 모두 정치성향이 비슷했다. 실제로 112석 중 자그마치 '''64석'''이 영남권 의석이였다.] 과반에서 4석 모자라는 133석으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영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주의 기반의 1당이란 점에서 전국적 지지세가 약했다는 한계점이 뚜렷했는데, 그도 그럴것이 영남에서는 사실상 전석을 모두 쓸어담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65석 중에서 64석을 쓸어담았는데 굳이 '사실상 전석'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그 나머지 1석이 울산 동구의 [[정몽준]]이었기 때문. 당시 울산과 현대가의 끈끈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이 쪽은 거의 예외로 떼놓고 봐야 할 수준이었고, 한나라당은 아예 이 지역에 후보를 공천하지도 않았다. 즉 한나라당은 '''영남에서 후보를 낸 지역에서는 100% 전석을 쓸어담았고''', 울산 동구를 비율에 포함시켜도 의석확보율 98.5%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찍었다.[*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선거때마다 민주당에 90% 이상의 득표를 몰아주던 전라도 지역을 싸잡아 북괴 공산당이냐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경우가 잦았는데, 정작 영남쪽 총선 결과가 저렇게 나온 이후로는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니들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란 식으로 역공을 당하는 웃픈 일도 있었다.] * '''군소 정당''' 한나라당 낙천 현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은 제법 거물들이 많아 기대를 모았으나, 막상 결과는 [[지역구]]와 [[전국구]]에서 1석씩 밖에 못건지며 대패하였다. 반면 한때 [[김종필]]의 가신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해 [[희망의한국신당]]을 만든 [[김용환(1932)|김용환]] 후보는 보령시-서천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김용환 후보가 [[허화평]]과 손을 잡았지만, 사실상 선거에 홀로 나와 홀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거물들이 대거 낙마한 민주국민당을 생각하면 저비용 고효율의 극치를 보여준 셈이었다. 이후 민국당은 한나라당 대신 여권에 협조하고, 김용환 전 의원은 당을 해체한 후 이듬해인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선거 직전인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당초에 창원과 울산에서 의석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되었고 실제 출구조사 결과에서도 2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막상 투표함을 까보니 두 곳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이기는 바람에 원내정당의 꿈이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사회당(1998년)|청년진보당]]은 비례득표에선 마찬가지로 저조했지만 지역구 득표에선 서울 전 지역구에 출마한 젊은 후보를 중심으로 진보정당 치고는 만만찮은 2~5%의 득표를 올렸으나,[* 일부 지역은 자유민주연합을 달고 나온 군소후보나 민주노동당 후보를 앞서기도 했다.] 이후 선거에서 진보 정당 포지션을 민주노동당에 빼앗겨 사실상 [[듣보잡]]화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정리하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기대치엔 못미친 선방[* 의석수를 늘렸고 전국정당화도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과반과 제1당 달성은 실패했다.], [[한나라당]]의 약진, [[자유민주연합]]의 [[교섭단체]] 달성 실패 정도로 요약되며, 선거는 백중세였지만[*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친여권 성향 무소속까지 합치면 범여권 의석이 과반을 간신히 넘겼다. 그래서 후술되어있듯 전반기 국회의장도 새천년민주당이 가져갔다.] 그래도 당만으로 따지자면 제1당을 차지한 한나라당이 최대 승리자라고 간주되었다. 참고로 이때 [[노무현]] 후보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종로구]] 대신 [[부산광역시]]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다만 이런 그의 모습은 훗날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되고, 이런저런 여파가 겹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보수 텃밭이 된 PK 지역은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TK 대비 보수세가 약화된다. 한편, 재미있게도 이때 영남에서 비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된 유일한 사람이 울산에서 당선된 [[정몽준]] 후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